에미시족의 마을에 어느날 재앙신이 나타나 인간들을 위협한다. 주인공은 결투 끝에 포악해진 재앙신을 쓰러뜨리지만, 저주의 상처를 받고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한다. 저주를 풀기 위해 먼 길을 떠난 주인공. 결국 재앙신이 인간의 총에 맞은 ‘멧돼지’였다는 것과, 재앙신의 저주가 숲을 파괴하려는 인간들 때문이란 사실을 알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자연을 짓밟아 터전을 넓히려는 인간과 그들의 야욕에 분노의 재앙신으로 변한 멧돼지떼 사이에 처절한 사투가 벌어진다….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 中-
도심 한복판에서 미친듯이 날뛰다 마지막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한 채 고속도로에서, 한강에서, 창경궁에서 죽어간 멧돼지들. 그 모습을 보면서 일본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를 떠올리게 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그들에게도 인간을 향한 항변의 기회를 한번쯤 줘야 하지 않을까.
이 땅에서 멧돼지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당신들 인간이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숲이 이상해진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윙윙거리는 이상한 소음에 나무들이 잘려 나가고, 엊그제 먹이를 찾아 헤맸던 숲이 다음날 사라져 버리는 이상한 날들의 연속. 그리고…. 어느날 정신을 차려보니 온 세상이 적막해져 있었다. 호랑이의 포효도, 바스락거리며 숨죽인 채 다가오는 늑대의 팽팽한 긴장감도, 순식간에 마법처럼 사라졌다.
어느새 우리는 숲속 먹이사슬의 최상 위에 군림해 있었다. 개체수가 늘어나자 숲도 비좁아졌다. 만약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영문모를 고요 속에 불안에 떨면서도, 그저 늘 하던 대로 본능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것뿐. 우리 멧돼지는 일부러 당신들을 위협하려 도심까지 내려간 것이 결코 아니다. 뾰족하게 솟은 어금니 때문에 우리를 포악하다 생각하나 보지만, 어쩌다 산에서 등산객 냄새만 맡아도 300m 전방에서부터 부리나케 도망갈 정도로 겁이 많은 우리다.
암놈과 새끼들에게 터전을 물려주고 힘센 숫놈에게 밀려, 정처없이 먹이를 찾아 헤매다 길을 잃고 내려간 도시. 그곳은 우리에게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표범보다 더 빠른 자동차와 1,000년 묵은 신령수보다 더 높은 빌딩, 익숙한 숲과 달리 정신없이 꼬불꼬불 뻗어있는 콘크리트 길. 적막한 숲과 달리 귀를 찌르는 굉음은 우리를 극도의 공포와 흥분상태로 몰아넣었다. 낯선 미로 속에 길을 잃은 우리는 절망적으로 날뛰며 숲으로 돌아갈 길을 찾았다.
도시를 벗어나고 싶어 필사적으로 한강을 건너던 한 친구는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죽었다. 섬과 섬을 건너다닐 수 있을 만큼 헤엄을 잘 치는 우리 멧돼지가 강에서 익사한 것이다. 밧줄에 발목을 묶인 채 거꾸로 물에 처박히고 모터보트는 기진맥진한 그의 몸을 수차례 들이받았다. 옆 산으로 건너가려던 친구 일가족은 산을 끊어놓은 당신들 때문에 고속도로에서 떼죽음을 당했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갈 곳이 없다. 숲으로 돌아갈 수도, 도심에서 살 수도 없다. 표범과 늑대에게 다시 쫓기더라도,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흙탕물에 뒹굴며 진흙목욕을 하고, 깨끗한 호수에서 물놀이를 하고, 접시 모양으로 땅을 파서 둥지를 만든 후 친구들과 정겹게 모여 자던 옛날이 그립다.
요즘 당신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를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을지에 대해 연구 중이라고 들었다. 우리 중 일부가 죽어야만 숲이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로서도 별 도리없이 그 대가를 치르겠다. 그러나 당신들 인간은 어떻게 죗값을 치를 것인가. 숲의 생태계가 기형이 된 것은 숲을 제물로 삼아 지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번식해온 인간, 당신들 때문이다.
우리를 도심으로 불러들인 것도 당신들이고, 영문도 모르는 우리를 죽이는 것도 당신들이다. 인간의 심판으로 우리를 죽여 숲의 생태계를 되살리겠다면, 가장 큰 죄를 지은 당신들은 대체 누구의 심판을 받을 것인가.
■멧돼지란
▲형태=몸은 굵고 길며, 네 다리는 비교적 짧아서 몸통과의 경계가 확실하지 않다. 눈은 비교적 작고 시력이 매우 나빠 전방 30m 앞의 물체를 겨우 구분하는 정도이다.
▲특징=날카로운 견치를 가지고 있어서 부상을 당하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용감하게 반격하는 습성이 있다. 멧돼지는 피하 지방조직이 3~5㎝나 될 정도로 두꺼우면서도 바람을 싫어한다. 눈 속의 식물뿌리를 캐어 먹으면서도 추위는 싫어한다.
▲식성=본래 초식성이지만 토끼, 들쥐 등 작은 동물부터 물고기, 곤충에 이르기까지 아무거나 먹는 잡식성이다. 배불리 먹으면 아무 걱정없이 곧바로 잠이 드는 단순한 성격이기도 하다.
▲번식=교미 시기는 12월에서 1월 사이이며, 암컷 한 마리의 뒤를 수컷 여러 마리가 쫓으며 쟁탈전을 벌인다. 7~13마리의 새끼를 낳으며 새끼의 양육은 생후 2년 가량의 암컷이 담당한다.
〈글 정유진기자 sogun77@kyunghyang.com〉
〈사진 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