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워리 비 해피」는 바비 맥퍼린의 노래 제목이다. 워리와 해피는 또한 한때 우리가 개에게 붙여주던 흔한 이름이기도 하다. 시인은 어린 시절 워리와 해피라는 개를 키우며 겪었던 잊지 못할 일을 노래와 같은 제목의 시로 천연덕스럽게 늘어놓는 가운데 감춰진 감정을 문장의 행간에 새겨두고 있다. 워리는 화자가 어린 시절에 키우던 몸집도 맷집도 좋은 산만큼 커다란 황구였다. 아무나 보고 반갑다고 꼬리치는 이 순진한 짐승은 그로 인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해서 제 주인인 어린 나에게 매를 맞기도 했다. 매를 맞으면서도 꼬리를 치는 붙임성 좋은 개, 워리는 동네 아줌마와 애들에게 아까징끼 값을 대주고도 툭하면 맞아서인지 마침내 장염에 걸리고 만다. 아버지는 고기 값에 약값까지 얹어 받아내고는 병들어 똥을 제 몸의 부피만큼 싸놓은 가련한 짐승의 몸을 팔아 넘긴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간에 덩치 큰 존재가 쓰러지게 될 때는 그 크기 때문에 오히려 슬픔이 배가된다. 워리를 죽여 보신탕을 해먹는 주인집 아저씨의 금강야차 같은 모습은 시인인 화자에게 그가 평생 그 고기를 씹고 있을 듯한 모습으로 각인된다. 그러나 워리를 약값까지 받아내고 팔아넘긴 아버지와 그 고기를 먹어치우는 아저씨에 대한 원망이나 고발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시를 너무나 단순히 읽고 마는 것이다.
이름이 복실이기도 했던 해피만은 워리와 같은 처지가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동네 아저씨들은 해피 또한 가만 두지 않았다. 어린애였던 “착한 나”는 그 동네 아저씨들을 피해 뒷산을 타넘어 자기에게 달려온 해피를 동네 아저씨들에게 넘겨주고 만다.
시인 스스로가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착한 나는 내게 꼬리치는 착한 해피 목에 줄을 걸어 넘겨주고는 이렇게 진술한다. “지금도 내손모가지는 팔뚝에 얌전히 붙어 있습니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자신을 믿고 따르던 착한 개 해피를 죽음의 구렁텅이에 넘겨주고는 고스란히 배반자가 된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시인이 자신에 대한 회한을 멀쩡하게 붙어있는 “손모가지”에 대한 원망으로 돌려서 말할 때 이 시는 절정을 이룬다. 선의를 희생시키고 배반자가 되어 품게 되는 감정의 역동적이고 역설적 표현은 복잡하고 갈피 잡을 수 없는 심정의 깊이를 드러낸다.하지만 키우던 개에 대한 야차스런 어른들의 모습과 배반자로서 품게 되는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이 시를 읽는 묘미의 전부는 아니다. 워리와 해피라는, 중의적 의미를 품고 있는 시 제목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야차 같은 동네 아저씨들에게 넘겨준 것은 해피라는 이름을 가진 한 마리 개일 뿐 아니라 해피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행복의 실체이기도 하다. 우리가 목을 걸어 묶어두었던 행복이라는 것이 내 자신의 손에 의해 어떻게 넘겨지고 마는가. 착하다는 말을 듣고 무심코 넘겨주고 만, 보잘것없이 여겨지던 행복이라는 것은 그 후 어떤 모습으로 내 속에 각인되어 있다가 나를 진저리 치게 만드는가. 우리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얼마나 오랫동안 후회와 슬픔 속에 갇혀 있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대책 없이 무턱대고 사람을 좋아하던 개 워리의 삶 역시 심상하게 세상사를 대하다 느닷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우리의 불행, 근심거리라는 뜻을 가진 워리의 덩치 큰 모습과 닮아 있다.
“돈 워리 비 해피”라는 바비 맥퍼린의 노래 가사처럼 문젯거리는 걱정하는 동안 오히려 배가되고 해결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걱정 마 행복해질 거야”라는 이 표면적 위로의 말은 이 시에서는 철저하게 가짜 위로의 말로 읽힌다. 위로의 이름으로 워리와 해피를 속이고 배반하고 마는 역설의 이야기는 이 시를 웃음과 슬픔을 버무려 동시에 한 가슴 안에 끌어안게 한다.
- 글 최정례 시인 <내마음의시 내마음의 풍경>-
이름이 복실이기도 했던 해피만은 워리와 같은 처지가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동네 아저씨들은 해피 또한 가만 두지 않았다. 어린애였던 “착한 나”는 그 동네 아저씨들을 피해 뒷산을 타넘어 자기에게 달려온 해피를 동네 아저씨들에게 넘겨주고 만다.
시인 스스로가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착한 나는 내게 꼬리치는 착한 해피 목에 줄을 걸어 넘겨주고는 이렇게 진술한다. “지금도 내손모가지는 팔뚝에 얌전히 붙어 있습니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자신을 믿고 따르던 착한 개 해피를 죽음의 구렁텅이에 넘겨주고는 고스란히 배반자가 된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시인이 자신에 대한 회한을 멀쩡하게 붙어있는 “손모가지”에 대한 원망으로 돌려서 말할 때 이 시는 절정을 이룬다. 선의를 희생시키고 배반자가 되어 품게 되는 감정의 역동적이고 역설적 표현은 복잡하고 갈피 잡을 수 없는 심정의 깊이를 드러낸다.하지만 키우던 개에 대한 야차스런 어른들의 모습과 배반자로서 품게 되는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이 시를 읽는 묘미의 전부는 아니다. 워리와 해피라는, 중의적 의미를 품고 있는 시 제목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야차 같은 동네 아저씨들에게 넘겨준 것은 해피라는 이름을 가진 한 마리 개일 뿐 아니라 해피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행복의 실체이기도 하다. 우리가 목을 걸어 묶어두었던 행복이라는 것이 내 자신의 손에 의해 어떻게 넘겨지고 마는가. 착하다는 말을 듣고 무심코 넘겨주고 만, 보잘것없이 여겨지던 행복이라는 것은 그 후 어떤 모습으로 내 속에 각인되어 있다가 나를 진저리 치게 만드는가. 우리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얼마나 오랫동안 후회와 슬픔 속에 갇혀 있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대책 없이 무턱대고 사람을 좋아하던 개 워리의 삶 역시 심상하게 세상사를 대하다 느닷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우리의 불행, 근심거리라는 뜻을 가진 워리의 덩치 큰 모습과 닮아 있다.
“돈 워리 비 해피”라는 바비 맥퍼린의 노래 가사처럼 문젯거리는 걱정하는 동안 오히려 배가되고 해결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걱정 마 행복해질 거야”라는 이 표면적 위로의 말은 이 시에서는 철저하게 가짜 위로의 말로 읽힌다. 위로의 이름으로 워리와 해피를 속이고 배반하고 마는 역설의 이야기는 이 시를 웃음과 슬픔을 버무려 동시에 한 가슴 안에 끌어안게 한다.
- 글 최정례 시인 <내마음의시 내마음의 풍경>-